반도체 설계 전문을 뜻하는 '팹리스(Fabless)'가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 또 한 번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공장이 없는 것을 넘어, 이제는 칩의 물리적 도면(레이아웃)을 직접 그리는 하드웨어 설계에서 벗어나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브로드컴과 디자인하우스(DSP) 업계 영역 확장이 이러한 변화를 가속했다. 이제 팹리스는 물리적 개발 부담을 덜고, 오직 독창적 콘셉트(아이디어)와 소프트웨어 역량으로 시장을 설득해야 하는 변곡점에 섰다.
HW 사양 경쟁 종말…'콘셉트 공유 플랫폼'으로 전환
팹리스는 공장만 없을 뿐, 사실상 '누가 칩의 도면을 더 작고 정교하게 그리느냐'를 두고 경쟁하는 하드웨어 중심 사업모델이었다. 어떤 선단 공정을 쓰는지, 칩 자체 사양이 얼마나 높은지가 곧 기업의 가치였다. 내부적으로 방대한 하드웨어 설계역량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나 인프라가 서비스화되는 '비즈니스 2.0 시대'에는 철저히 '콘셉트'로 승부를 보게 된다. 팹리스가 독창적 칩 콘셉트만 정의해 오면, 콘셉트 핵심인 블록(NPU 등)을 제외한 나머지 범용 인프라 영역은 브로드컴이나 DSP들이 패키지로 묶어 제공하는 방식이다.
구조적 변화의 대표 사례가 국내 AI 반도체 스타트업 퓨리오사AI의 1세대 칩 'VNPU'와 모빌린트의 '애리즈(ARIES)'다. 두 회사 칩은 아키텍처가 완전히 다르지만, 칩을 뜯어보면 핵심 NPU 블록을 제외한 나머지 베이스 영역은 사실상 동일하다. 국내 대형 DSP 세미파이브가 구축한 동일한 시스템온칩(SoC) 플랫폼 위에서 찍었기 때문이다.
NPU 업체 입장에서는 이처럼 자신들이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핵심 코어를 제외한 전 영역의 물리 설계를 DSP에 맡김으로써, 제품 개발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됐다.
국내 디자인하우스 한 관계자는 "팹리스들의 개발속도 단축 요구와 맞춤형 반도체(ASIC)를 원하는 고객 급증 등으로, 향후 DSP들이 프론트엔드 설계 영역까지 완전히 도맡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엔비디아도 인력 70%가 SW… 핵심은 'SDK'
이에 따라 글로벌 팹리스들이 화력을 쏟아붓는 분야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다. 국내 대표 NPU 기업은 이미 소프트웨어 인력 숫자가 하드웨어 설계 인력을 압도하고 있다.
퓨리오사AI와 모빌린트의 경우, 창업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체 인력 3분의 2 이상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유지해 오고 있다. 리벨리온과 딥엑스, 하이퍼엑셀 역시 최근 소프트웨어 인력을 늘리며, 개발에 열을 올리는 추세다. 글로벌 AI 반도체 공룡 엔비디아 역시 전체 인력 70%가 소프트웨어 조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소프트웨어 인력 확보가 기업 생사를 가르는 이유는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SDK) 완성도 때문이다. AI 칩을 고객 데이터센터나 장비에 연동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와 알고리즘을 연결하는 SDK가 필수다. SDK는 상용화 후에도 계속 업데이트해야 하는데, 이 체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공력이 칩을 찍어내는 일보다 훨씬 크다.
국내 한 NPU 기업은 글로벌 고객사로부터 제품 도입 문의를 받고 칩 실물까지 전달했으나, SDK 지원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최종계약 단계에서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글로벌 엣지 AI 반도체 시장 1위 기업 헤일로 김귀영 한국지사장은 "헤일로가 글로벌 빅테크를 제치고 시장 1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하드웨어 사양이 아니라, 고객이 쓰기 편하도록 끊임없이 지원한 SDK 아키텍처 덕분"이라며 "이 때문에 현재 헤일로 글로벌 직원 중 대부분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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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밖 '실전 판매'… 매출이 최종 종착지
결국 팹리스들은 기술 수치나 연구실 안에서의 마케팅이 아닌, 실제 상용 공급망을 통해 유의미한 매출을 내야 한다. 턴키 플랫폼 등장으로 칩을 만드는 문턱이 낮아진 만큼, 이제는 시장 안착을 통한 산업화 단계로 증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지훈 한양대 교수(융합전자공학부)는 "한국 반도체 스타트업들이 연구실 단계 성과에 안주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이제는 실제 산업 전반의 수요처와 연계해 제품을 직접 판매하고 고정 매출을 일으키는 '실전 산업화' 단계로 완전히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